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리 안드로포프 (문단 편집) === 서기장 취임 후 === 전반적으로 '''사회의 나사를 조였다'''는 평가가 많다. 브레즈네프 시절을 거치면서 해이해진 국가와 사회기강에 [[니콜라이 리즈코프]] 등 당시 브레즈네프 아래에서 일하던 개혁파 인물들을 동원해 구체적인 정책을 정했고 [[KGB]]와 밀리치야(인민경찰), [[지구당]]을 동원하여 박차를 가하였다. 안드로포프는 취임 후 브레즈네프 시기의 정체된 노선에 수정을 가하면서 [[노동자]]들의 [[꾀병]]이나 [[https://news.joins.com/article/1682223|무단결근]][* 스탈린 시대에는 그야말로 지옥같은 노동 환경을 구현했지만 흐루쇼프 시대부터는 직장분위기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브레즈네프 시대 후반기에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서 아예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결근한다든지 직장인들끼리 입을 맞추어서 며칠씩 쉬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아예 출근도장만 찍고 그냥 노는 경우도 있었기에 소련 산업 생산성에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큰 골칫덩어리였다.]을 근절하기 위한 노동 규율의 확립[* 인민경찰(밀리치야)들을 시켜서 무단 결근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직장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고르바초프 자서전 <선택>)], 경제적 탈집중화와 같은 실험적인 경제개혁 등으로 경제 생산력의 향상을 꾀했다. 실제로 이 때 실시한 경제개혁의 영향으로 브레즈네프 중후반기 내내 하락한 경제성장률이 반등해서 1985년까지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다시 4%대를 기록하며 고질적인 성장률 저하 문제에서 벗어난 듯 싶었다.[* 안드로포프가 추진한 정책인 '원칙과 질서' 캠페인은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인상 깊게 조명받는다. (고르바초프 자서전 <선택>)] 그러나 결국엔 1986년 유가폭락 시기부터 소련의 경제는 다시 침체기에 빠지게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강경노선을 추구함과 동시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실추된 소련의 위상을 다시 복구시키기 위해 당의 원로 세력들을 갈아치우고 개혁 성향을 지닌 젊은 기술 관료([[테크노크라트]])들이었던 고르바초프와 [[니콜라이 리즈코프]][* 훗날 고르바초프 밑에서 [[소련 장관회의]] 주석으로 재직했다.] 등을 중용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내부 체제 단속을 위해 이스라엘로 이민하는 소련 [[유대인]]의 숫자를 극소수로 제한했고, 문화·예술·언론을 탄압했다. 하지만 지병인 [[만성 콩팥병]]의 [[https://news.joins.com/article/1721271|악화]]로 정기적인 출근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며[* 만성 콩팥병 환자들은 일상생활에서 [[투석]]이 불가피한데 안드로포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석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고통을 견디며 해야 하는 매우 힘든 과정이다. 안드로포프가 가면 갈수록 기력이 뚝 떨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에 추대되었을 때는 연단에 오르는 그의 병약한 모습이 소련 사회에 충격을 줄 것을 우려하여 수락연설조차도 생략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는 재임 기간의 절반 이상을 병원과 크림반도의 요양소에서 보냈고 KGB는 그를 포함한 노쇠한 정치국원들을 위하여 레닌 묘소에 에스컬레이터까지 설치했다. 결국, 1983년 8월에 헝가리 공산당 서기를 접견한 이후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안드로포프는 이렇게 되기 얼마 전부터 이미 고르바초프를 자신의 후임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집권 기간이 너무 짧았을 뿐만 아니라 보수파의 수장인 체르넨코의 세력이 아직 강했기 때문에 이를 실현시키지 못했다. 병으로 쓰러진 이후에도 병상에서 국정을 챙기려고 했지만 이미 안드로포프의 명이 다했음을 알아챈 관료들은 대부분 체르넨코 편에 서고 있었다. 문제는 이 시기 체르넨코도 지병인 폐기종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하지만 고르바초프를 후임으로 삼는다는 생각은 좌절되었어도, 안드로포프의 재임기 동안 고르바초프가 중앙당에서 최고 권력자의 비호 아래 매우 성공적으로 요직을 수행하면서 인맥을 쌓은 것은 향후의 역사에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동안 쌓은 실적을 바탕으로 체르넨코 정권 아래에서도 2인자가 될 수 있었는데 안드로포프의 집권기라도 없었다면 고르바초프가 정말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을지 영 의문스럽다. 임종하는 자리에 고르바초프를 불러다 놓고 아들 이고르의 장래까지 부탁할 정도로, 고르바초프와는 이미 평범한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를 넘을 정도로 신뢰하는 사이였고 이는 안드로포프의 지지자들이 상당 부분 고르바초프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대 급부로 체르넨코 계열이 고르바초프를 경계하게 되는 현상도 나타나기는 했다. 1984년 2월 9일 안드로포프가 6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 후임으로 장례위원장을 맡은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취임했다. 안드로포프의 유해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레닌 영묘]] 뒷편의 [[크렘린 벽 묘지]]로 이동하여 스탈린과 수슬로프의 묘 사이에 묻힘으로써 소련 공산당 내에서는 안드로포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을 반영했다.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비록 서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이였지만 상대국 국가원수에 대한 존중의 차원에서 소련 대사관을 방문해 그에 대한 조의문에 서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